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찐 전문가는 그 자체로 스토리텔러입니다

요약 순서를 바꾸는 게 아니라 입구를 바꿉니다. 듣는 사람은 저마다 다른 칸에서 궁금증이 시작되는데, 우리는 대개 우리가 준비한 순서로 말합니다. 자료를 다시 만들지 않습니다. 준비물은 종이 한 장입니다.

코칭에서 자주 하는 실습이 있습니다. 먼저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 이 내용을 팀장님께 보고한다고 생각하고 해 보십시오."

대부분 잘합니다. 매일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술술 나옵니다. 그다음에 조건을 하나 바꿉니다.

"이번에는 같은 내용을 본부장님께 말씀드린다고 생각하고 해 보십시오."

여기서 많은 분이 멈칫합니다. 본부장님은 스타일이 다르시기 때문입니다. 고민 끝에 다시 시작하는데, 대개 앞에서 한 말을 그대로 반복합니다. 속도만 조금 빨라집니다. 내용은 같습니다. 그런데 어딘가 안 맞습니다. 본인도 느낍니다. 다만 무엇이 안 맞는지를 모릅니다.

무엇이 안 맞았는지는 한 줄로 적어 글 끝에 두겠습니다. 그리고 이 실습의 반대편에 선 분이 있습니다. 전문성은 방 안의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던 분입니다. 그 이야기는 뒤에서 하겠습니다.

팀장님께는 됐는데 본부장님 앞에서 멈칫 합니다

혹시 이런 적 있으십니까. 같은 자료로 두 번 발표했는데 한 번은 반응이 좋고 한 번은 미지근했습니다. 기술팀 회의에서 잘 통한 설명이 경영진 보고에서는 중간에 끊깁니다. "그래서 결론이 뭡니까." 아직 절반도 못 갔는데 말입니다. 고객 앞에서는 상대가 자꾸 다른 것을 물어서 자료를 앞뒤로 넘기다가 흐름을 잃습니다.

그런데. 이 세 장면의 원인은 하나입니다. 듣는 사람의 궁금증이 시작되는 지점이 저마다 다른데, 우리는 대개 우리가 준비한 순서로 말합니다.

임원에게는 결론부터 말하라는 조언은 다들 들어 보셨을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 봤더니 더 헷갈렸다는 분도 많습니다. 결론만 앞으로 옮기고 나머지를 손대지 않으면 인과가 끊기기 때문입니다. 자료는 다시 만들지 않습니다. 준비물은 종이 한 장입니다. 끝까지 읽으면 다음 보고에서 어디서부터 말할지 정하는 기준 하나가 생깁니다.

체인에는 입구가 여러 개 있습니다

앞 편에서 내용을 인과의 체인으로 연결하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렇게 생긴 것이었습니다.

① 상황 → ② 원인 → ③ 조치 → ④ 결과 → ⑤ 남은 문제 느리다 → 이래서 → 이렇게 함 → 이렇게 됨 → 이건 남았다

우리는 이것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만 말합니다. 만든 순서가 그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듣는 사람은 저마다 다른 칸에서 궁금증이 시작됩니다.

같이 일하는 기술팀은 ② 원인부터 궁금합니다. 상황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결정을 내리는 임원은 ④ 결과부터입니다. 얼마나 좋아졌고 얼마가 드는지가 판단 재료이기 때문입니다. 돈을 내는 고객은 ④ 결과와 ⑤ 남은 문제를 봅니다. ① 상황부터 필요한 사람은 처음 듣는 사람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거의 항상 ①번부터 시작합니다. 발표자에게 가장 쉽고 자연스러운 흐름입니다. 그래서 임원 보고에서 "결론이 뭡니까"를 듣습니다. 그분은 ④번을 기다리고 있는데 우리는 ①번을 설명하고 있었던 겁니다. 저는 이것을 입구 옮기기라고 부릅니다.

입구를 옮긴다는 것은 시작점을 바꾸고, 거기서부터 나머지 칸을 인과가 이어지게 다시 도는 것입니다. ④번에서 시작하면 이렇게 갑니다.

"응답 속도가 200밀리초에서 80으로 줄었습니다. (④ 결과) 원인은 같은 데이터를 매번 새로 불러오는 구조였습니다. (② 원인) 그래서 캐시에 계층을 하나 더 얹어서 해결했습니다. (③ 조치) 다만 오래된 데이터가 나갈 위험이 남아서, 지표 다섯 개를 새로 보고 있습니다. (⑤ 남은 문제)"

200에서 80이니 120이 줄었습니다. 절반 아래로 내려갔습니다. 결정을 내리는 사람이 먼저 알고 싶은 것이 이 한 줄입니다. 같은 체인이고 항목도 숫자도 그대로입니다. 출발점만 ④번으로 옮겼는데 인과는 그대로 이어집니다.

순서를 바꾸는 게 아니라 입구를 바꿉니다.

체인에는 입구가 여러 개 있습니다

체인 전체를 종이 한 장에 그립니다

입구를 옮기려면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체인 전체가 한눈에 보여야 합니다. 머릿속에 순서로만 들어 있으면 못 옮깁니다. 순서는 처음부터 재생해야 나오기 때문입니다. 노래 가사를 3절부터 부르기 어려운 것과 같습니다.

간단한데 안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슬라이드에 다 담겨 있으니까요. 문제는 그 슬라이드가 한 장이 아니라 수십 장이라는 데 있습니다. 만들고 나면 우리는 슬라이드에 의존해서 생각합니다.

그래서 한 장이 필요합니다. 종이 한 장에 다섯 칸을 그리고 화살표로 잇는 것이면 충분합니다. 예쁘게 그릴 필요는 없습니다. 발표 자료에 넣지 않을 그림입니다. 이 그림이 있으면 어느 칸에서든 출발할 수 있고, 질문이 들어와 옆으로 새도 자기 위치를 알기 때문에 돌아옵니다.

무엇부터 말할지 정하는 기준은 하나입니다. 이 사람이 나에게 던질 첫 질문이 무엇이겠는가. 그 질문의 답이 있는 칸에서 시작합니다. 발표 직전 30초면 정할 수 있습니다. 다만 미리 정해 두어야 합니다. 무대에 올라가서 정하려고 하면 늦습니다.

첫 질문을 예측하는 방법도 간단합니다. 그 사람이 이 사안에서 책임지는 것을 보면 됩니다. 일정을 책임지는 사람은 언제부터 묻습니다. 비용을 책임지는 사람은 얼마부터 묻습니다. 품질을 책임지는 사람은 무엇이 남았는지부터 묻습니다. 그 일을 같이 하는 사람은 어떻게부터 묻습니다. 직급이 아니라 책임입니다.

예측이 틀려도 괜찮습니다. 그림이 있으면 옮겨 갈 수 있습니다. 첫 질문이 예상과 다르게 들어오면 그 칸으로 가서 거기서부터 돌면 됩니다.

순서를 바꾸는 게 아니라 입구를 바꿉니다.

종이 한 장에 다섯 칸을 그립니다

같은 용어가 부서마다 다른 뜻입니다

전문가의 말하기에서 용어는 정확해야 합니다. 그런데 정확하다는 것은 단어를 맞게 쓰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 단어의 앞뒤 맥락까지 맞아야 합니다.

같은 용어가 부서마다 다른 뜻으로 쓰이는 경우가 흔합니다. '검토'가 어떤 팀에서는 정식 절차이고 어떤 팀에서는 그냥 한번 본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모르고 쓰면 같은 회의에서 두 사람이 다른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맥락이 달라지면 단어를 바꾸거나, 정의를 한 번 붙여야 합니다.

"여기서 검토라고 말씀드리는 건 정식 절차가 아니라 사전 확인 수준입니다."

한 문장입니다. 이 한 문장이 30분짜리 오해를 막습니다.

제가 만난 잘하는 전문가들의 설명이 편하게 들린 이유도 여기 있었습니다. 듣는 사람이 궁금해하는 순서와 설명하는 사람의 인과 순서가 맞으면 설명이 편하게 들립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말합니다. 높은 수준의 진짜 전문가는 그 자체로 스토리텔러입니다. 이야기를 지어내는 사람이 아니라, 그 일이 실제로 벌어진 순서를 그대로 따라가는 사람입니다.

제 머릿속에 질문이 쌓이기만 했습니다

글 앞에서 미뤄 둔 이야기입니다. 장비를 파는 현장에서 기술을 설명하는 일을 오래 해 온 분이 있었습니다. 설명은 빠르고 쉼이 없었고, 전문용어가 화려하게 섞여 나왔습니다.

그런데 듣고 있으면 지금 어디를 듣고 있는지 알기 어려웠습니다. 성능 수치를 말하다가 설치 조건으로 갔다가 다시 성능 수치로 돌아왔습니다. 청중 역할을 하고 있던 제 머릿속에 생긴 질문은 답을 만나지 못하고 쌓이기만 했습니다.

그분의 발표에 순서가 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장비를 기준으로 한 순서였습니다. 장비의 구조가 그렇게 생겼으니 그렇게 설명한 겁니다. 다만 앞에 앉은 사람은 그 장비로 공정을 개선하고 싶은 사람이었습니다. 발표자의 포인트는 장비였고, 고객의 포인트는 공정 개선이었습니다. 코칭에서 그분이 스스로 찾아낸 것도 이것이었습니다. 어느 관점으로 시작할지 명확해지면 다음은 간단합니다. 그 영역의 선수니까요.

본부장님 앞에서 멈칫하던 분과 이분은 정반대처럼 보입니다. 한쪽은 말이 막히고 한쪽은 쉼 없이 나왔습니다. 두 장면에서 바뀐 것은 속도뿐이었습니다. 입구는 둘 다 하나였습니다.

당신의 청중은 어느 칸에 서 있습니까

다음 발표의 청중을 떠올려 보십시오.

매일 같이 일하는 분들이라면 ① 상황은 건너뛰십시오. 당신이 ①번을 말하는 동안 그분들은 딴생각을 합니다. 친절해 보여도 실제로는 시간 낭비입니다.

결정을 내리는 분이라면 ④ 결과에서 시작하십시오. 나머지는 질문이 들어오면 그때 하십시오. 질문이 없다는 것은 이미 판단이 섰다는 뜻입니다.

처음 듣는 분이라면 ① 상황부터 하셔도 됩니다. 다만 짧게 하십시오. 상황 설명이 길어지면 그분도 "그래서 결론이 뭡니까"를 묻기 시작합니다.

어느 쪽이든 자료는 하나입니다. 바뀌는 것은 첫 마디뿐입니다. 질문은 하나입니다. 다음 보고에서 당신 앞에 앉는 사람이 책임지는 것은 일정입니까, 비용입니까, 품질입니까.

30초 실천

우선은 다음 회의나 보고 하나를 떠올리고 한 문장만 적어 보십시오.

"그 사람이 나에게 던질 첫 질문은 ______일 것이다."

적으셨으면 당신이 준비한 첫 마디가 그 질문의 답인지 확인하십시오. 아니라면 순서를 바꾸십시오. 자료는 그대로 두셔도 됩니다. 입 밖으로 나가는 첫 마디만 바꾸면 됩니다. 첫 질문이 안 떠오르면 직함 대신 책임을 적어 보십시오. 일정, 비용, 품질 중 하나일 겁니다.

첫 질문 하나만 적어 보십시오

본부장님 앞에서 무너지지 않으려면

글 앞에서 끝에 두겠다고 한 한 줄입니다. 말을 못 해서가 아니라 입구가 하나뿐이었던 겁니다.

팀장님은 그 일을 매일 같이 보는 분입니다. ① 상황을 이미 압니다. 그래서 ①번부터 시작해도 걸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연스럽습니다. 본부장님은 다릅니다. 그분에게 이 안건은 오늘 열 개 중 하나입니다. ①번부터 들으면 "그래서?"가 먼저 나옵니다. 그런데 우리는 팀장님께 하던 순서를 그대로 씁니다. 매일 그 순서로 말했기 때문에 그게 유일한 입구가 되어 버린 겁니다.

내용은 같습니다. 문을 어디로 열어 드리느냐만 다릅니다.


말발보다 먼저인 것은 내용의 숙지였고, 숙지가 되면 체인이 생기고, 체인이 생기면 입구를 옮길 수 있습니다. 충분히 아는 사람은 간결하게 말합니다.

순서를 바꾸는 게 아니라 입구를 바꿉니다.

이 글은 전자책 『다 말하지 마세요』의 연재입니다. 전체 원고는 스마트스토어에서 구매하실 수 있습니다 — https://smartstore.naver.com/petercomm/products/13788987324

한창훈 · 피터의 커뮤니케이션

한창훈 · 피터의 커뮤니케이션19년째 전문가와 사업가, 임직원의 발표와 소통을 돕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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